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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6. 최초의 황제

행복찾아라 2018. 3. 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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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춘추전국시대에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중국최초로 황제의 칭호를 썼던
진시황.
그의 생애와 업적을 알아보겠습니다.

생애
때는 기원전 259년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자초와 조희의 아들로 태어난
영정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 자초는 진나라 소양왕의
손자였습니다. 하지만 왕의 손자가 왜
다른나라에서 있었냐하면
당시 진나라는 조나라에 인질을
한명 보내야할 상황이 생겼는데
이때 선택된자가 태자의 아들중
서자이고 서열도 낮은 자초를
보냈던것입니다.
이후 소양왕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
하자 인질이였던 자초와 영정은
죽을위기를 맞이하게되나
당시 상인이였던 여불위에의해
구출됩니다.
이 여불위는 야심이 컸던 사람입니다.
자초에게 자신의 첩 조희를 소개시켜줘서
결혼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 소양왕이 죽고나서 태자였던
안국군이 효문왕에 오르게되고
안국군의 많은 아들중 자초가 태자로
선택받게 됩니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모두 여불위의
계획대로 였습니다.
하지만 여불위에겐 운도 따랐나봅니다.
안국군 효문왕이 즉위한지 사흘만에
세상을 떠난것입니다.
그러니 태자자리에 있던 자초가
장양왕에 오릅니다.
이 장양왕(자초)도 몸이 좋지않아
3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영정이 왕좌에 오르게 됩니다.
장양왕 자초를 인질의 신분에서
왕으로 만들어주고
자초의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여불위의 권세는 하늘높은줄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영정은 즉위당시 13살이였고
승상이였던 여불위가 실권자로서
진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태후가 된 조희도 사실 자신의 첩
이였으니 진나라 왕 영정도
여불위의 아들이 아닐까하는
말들도 많습니다.
조희와의 불륜관계도 맺고 있던
여불위는 영정이 22살이 되던해에
영정에게 쫒겨나게되고 자신의
영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여불위를 몰아낸 영정은
증조할아버지 소양왕이 장기집권하며
강화시켜놓은 국력을 이용하여
전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웁니다.
실권을 잡은지 17년만에 전국을
통일해 버립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
수백년간 지속되어온 춘추전국시대를
끝낸 중국 최초의 왕이였습니다.

업적
아마 영정 자신도 자신의 업적이
대단하다는것을 알고있었는지
3황5제라 불리었던 성군들의
황자와 제자를 합쳐
최초의 황제라 칭합니다.
이가 바로 진시황(시황제)입니다.
그리고 황제라는 호칭과 더불어
천자의 명령을 교에서 조로 바꿉니다.
또한 천자의 자칭을 과인에서 짐으로
바꿔버립니다.
이 진시황이 규정한
황제의 칭호나 조와 짐의 용법은
청대까지 수천년간 사용됩니다.
또한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통일후
왕권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군현제를 실시하여 이전까지의
봉건제로는 제후의 힘이 강해졌기때문에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데 힘썼습니다.
또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였던
법가사상을 통일된 중국의 이념으로 삼고
사상개혁도 실시하게 됩니다.
화폐와 서체도 통일시키고
도량형도 통일시켜 통치를 원활히 할수
있게끔 많은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부정적인 측면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진시황.
그는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했다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폭군의 이미지가
아주 강하게 남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대표적으로 아방궁과 만리장성,
분서갱유와 진시황릉, 병마용갱,
불로장생을 위한 광기정도를
꼽을수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아직 혼란스러울때 아방궁과 만리장성등
대규모 공사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졌습니다.
또한 백성이 똑똑하면 통치하기
힘들다는 명목으로 분서갱유를
저지릅니다.
이는 세계역사상 유래없는
문화와 사상의 탄압이였고
분서갱유로 인해 많은 역사자료가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만약 이때의 자료가 남아있었다면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은'나라나 '주'나라도
공인받는 중국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폭정때문인지 진나라는
전국통일후 진시황 사후 2대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황제(황제라 칭함을 최초로 한 사람)의
중화라는 관념을 물리적으로
실현해낸 업적은
오래도록 기억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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